근대화 프로젝트를 주도했던 세력과 식민지화를 주도한 세력이 다르기 때문에 두 논쟁은 다른 듯하지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정치적 선동 가능성 경계해야 이렇게 난해하게 얽혀 있는 당시 상황에 대해 역사학계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논쟁을 진행했었다.
특별한 조약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러·일전쟁으로 재미를 본 일본의 군국주의 열차가 폭주하다가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패망에 이르는 과정을 읽지 못하고 미국과 영국을 귀축이라고 비판했다.근대화의 실패가 식민지화와 반(半)식민지화를 야기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수백 년 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근대화에 실패한 청과 조선이 몰락했고.그렇기에 역사인식의 정치화는 너무나 위험하다.
특히 근대화를 추진했던 지식인들은 시모노세키 조약 후 중국의 사신을 맞이했던 곳에 독립문을 세웠다.
시모노세키 조약에는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권력을 앞세워 반대 세력을 억누르기도 한다.
다산은 ‘문유(問儒)라는 글에서 부패한 부유(腐儒).조선이라는 나라는 선비의 나라였다.
그러나 선비(儒)란 모두 올바른 유자(儒者)는 아니었다.비록 자신들이야 재상이 되지도 못했고 역할을 부여받지도 못했으나.